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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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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윗은 언약궤를 가져오기 위해 얼마의 군사를 모집하는가?(1절)
2.
삼만을 다시 모음
블레셋과의 전쟁에 참여했던 이들을 다시 모음
삼만은 천명 단위의 30개 부대
1.
많은 수가 참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중요
자본주의의 물량주의 수량주의 가치에 함몰되어버린 오늘날의 교회
1.
거대함이 아닌 거룩함 필요.
2.
‘바알레유다’는 어디인가?(2절)
3.
다윗은 궤를 가져오기 위해 바알레유다로 내려감
바알레유다는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약 14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블 레셋과 가까운 곳
기럇여아림의 다른 이름이거나 서로 접해 있다가 후에 통합된 두 지역 의 이름일 것.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고 지성소에 그 언약궤를 넣었다. 이스라엘은 신상이 없기 때문에 블레셋과의 전쟁 때 언약궤를 가져다가 자기들의 신상 밑에 놓은다. 그런데 그 언약궤를 가져오면서 초토화 되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은 패배했지만 하나님은 패배하지 안았다는 것을 상징
다윗이 이 언약궤를 아비나답의 집에서 다시 가져올려고 할 때 성막이 있는 실로로 가져가는 것이 가장 옳은데, 다윗은 다윗성에 두려고 가져오고 있다. 언약궤를 가져오는 것은 종교적 의도, 그러나 다윗성으로 가는 것은 정치적 의도가 있다. 하나님이 다윗의 통치를 지지하신다. 다윗의 통치가 정당하는 것
1.
언약궤 운반의 책임자는 누구인가?(3절)
2.
궤 운반시 웃사와 아효가 함께 함
아비나답은 아들 엘리아살을 성별하여 궤를 돌보게 하였는데(삼상 7:1) 엘리아살이 죽고 그의 동생들인 웃사와 아효가 궤를 돌보았을 것.
1.
나곤의 타작마당에서 소들이 뛰었다는 표현은 무슨 의미인가?(6절)
2.
궤를 옮겨오고자 하는 다윗의 정치적 의도에 대해 하나님께서 길을 막 으신 것으로 해석 가능
수레를 끌었던 소들은 발람의 나귀와 비슷한 경험을 한 것
1.
하나님께서 자신을 정치적 이용도구로 활용하고자 하는 다윗의 의도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신 것
궤는 이용하고자 하는 자에게는 파괴적 능력으로, 의지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자에게는 축복의 능력으로 작용
1.
궤와 성전을 소유하는 것이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이 아님
하나님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보다는 자기가 하나님의 편이 되는 것이 중요.
1.
웃사의 죽음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가?(7-9절)
2.
웃사가 궤를 붙든 것으로 인해 죽임을 당함
베레스 웃사 사건
웃사는 고집, 힘, 강함을 의미함
베레스 웃사는 ‘고집을 침’이라는 의미
1.
거룩한 것과의 직접접촉을 통해 죽임 당함
2.
다윗의 분노
다윗의 분노는 누구를 향한 것인가
하나님, 웃사, 자기 자신(?)
아마도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였을 것
1.
율법에 의하면 궤는 레위인들에 의해서 채를 궤 양쪽 고리에 끼워 옮겨야 함(출 25:13-15; 37:4-5)
소가 끄는 수레로 옮기는 것은 율법 위반행위(대상 15:12-15)
두 번째는 사람들이 궤를 메어 옮김(대상 15:12-15)
1.
그런데 제의규정위반이 핵심이었다면 웃사와 야효가 궤를 집에서 내어 수레에 실을 때 죽임을 당해야 마땅함
수레에 싣고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길 때에도 마찬가지의 문제 발생해야 함
1.
사무엘서는 역대기와 달리 제의규정들로부터의 자유로움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함
사무엘하 8:18은 다윗의 아들들이 제사장이 되었다고 말함
개역개정은 제사장들을 대신들로 번역
레위기 번제규정에서는 제물은 수컷이어야 하는데 벧세메스 사람들은 궤를 싣고 온 암소를 번제로 바침(삼상 6:14).
1.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자기에게로 가져오게 함으로서 자신의 통치에 대한 신적 정당성을 옹호하고자 하였을 것
다윗은 이 사건을 하나님을 이용하고자 한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 메시지로 받아들임.
1.
오벧에돔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한 것은 어떤 의미인가?(12절)
2.
궤로 인하여 가드 사람 오벧에돔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함
민족, 종교가 하나님의 복과 저주를 가르는 기준이 되지 않음
1.
누가 참 이스라엘인가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이스라엘
신 5:3의 언약의 동시대화
하나님의 말씀을 나와 우리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자가 이스라 엘.
1.
관용적 표현(13절)
2.
여섯 걸음은 궤가 안식에 들어가기 전 단계의 긴 여정을 마무리 짓는 의미에서 사용된 것 같음
3.
문법적으로 ‘여섯 걸음을 옮길 때마다’로도 번역 가능하지만 처음 여섯 걸음을 옮겼을 때로 번역하는 것이 더욱 실제적.
4.
다윗은 왜 제사장들이 입는 에봇을 입었을까?(14절)
5.
다윗이 제사장들이 입는 에봇을 입음
성전건축이 완료되고 제사장직과 레위인들의 사역이 보다 독점화되었을 것
1.
민수기 16장의 고라반역시 족장 250명이 향료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볼 때 이때에 제사장직이 일반 백성의 지도자들 중에서도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2.
역대기에서는 출발에 앞서 레위인들이 제사를 드리고(대상 15:26), 궤 운반 후에도 레위인들이 번제와 화목제를 드림(대상 16:1)
다윗과 더불어 레위인들과 노래하는 자들도 모두 세마포 겉옷을 입음 (대상 15:27)
1.
언약궤를 처음 옮길 때에는 다윗이 왕의 자격으로 제의행렬을 주관하였지만, 두 번째에는 지극히 낮은 자로 행진에 참여함 – 다윗의 자세변화가 핵심.
2.
언약궤의 행방은?(17절)
3.
587년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되될 때 언약궤도 사라진 듯 보임
4.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궤가 없는 구원시대를 말함(렘 3:16).
5.
스바여왕 - 메네리크 왕자 열왕기상 10장 13절 여왕이 원하는 것을 솔로몬이 주었다
이스라엘은 매우 중요한 요충지 가나안 땅 위가 유럽, 아래가 아프리카, 동쪽이 아시아. 언약궤를 메네리크에게 언약궤를 맡겼다는 전설 에디오피아는 언약궤 축제가 있다. 사도행전 8장 가사(가자지구)에서 예루살렘에 예배드리고 돌아가는 에디오피아 내시가 이사야를 읽고 있었다. 어떻게 에디오피아 사람들이 야훼를 믿게 되었지? 에디오피아의 국교가 천명될 수 있었던 이유
301년 아르메니아가 기독교를 국교로 천명 331년 에디오피아가 기독교를 국교로 천명(이전에 유대교)-빌립의 전도 392년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천명
국교가 되려면 국가지도자가 받아들이고 천명해야 가능. 느브갓네살 이전에 언약궤가 없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신상도 없고 언약궤도 없으니까 신전의 기구를 가져갔음
1.
다윗의 춤은 왜 미갈에게 조롱을 받았을까?(20-23절)
2.
너무 기뻐 춤추는 다윗에 대한 미갈의 조롱과 다윗의 반박
메카르케르는 뛰면서 빙빙 도는 춤을 의미하는 ‘카라르’동사의 분사 형으로 계속해서 뛰며 빙글빙글 도는 춤을 의미
1.
미갈을 사울의 딸이라 칭함을 통해 미갈의 발언이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언약궤에 대한 사울집안의 입장임을 드러내고자 함
미갈과의 잠자리 거부를 통해 사울의 후손이 탄생하는 것을 미연에 방 지함. (9장의 므비보셋의 이야기도 그러하다)
마무리 나는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는가? 아니면 순종하려고 하는가? 예루살렘이 정치의 중심이자 종교의 중심이 되었다. 왕정신학, 시온신학, 성전신학 왕정신학이란 다윗의 후손들이 다르시를 왕정은 하나님의 지상대리자라는 것. 다윗의 후손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이 되고 다윗의 후손의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라 해석
시온신학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것, 그러므로 예루살렘은 절대 멸망하지 않는 것 시온신학이 증명된 것이 히스기야
사르곤 2세(705년까지 통치 최전성기 북이스라엘이 이때 멸망 산헤립(전 통치자가 너무 대단하다보니까 산헤립도 괜찮은데 바보 취급을 받게됨) 앗수르의 통치자로서 너무 많은 땅을 다스리는데, 왕권이 약해지니까 산헤립 때 많은 나라들이 독립을 꿈꾸게 됨. 산헤립에 대한 소문이 있으니까 봉기를 일으키는데 이때 주도했던 사람이 바로 히스기야이다. 산혜립이 바로 봉기를 진압 못함 왜냐하면 앗수르 안에서 내부 반란이 일어나고, 북방에서 쳐들어오니까 독립을 하려는 나라들을 빠르게 진압하지 못하게 된다.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야 701년에 히스기야를 잡으려고 군대를 보냄. 메소포타미아에서 예루살렘에 오려면 비아마리스 길을 걸어와야 하는데, 쭉 내려와서 지중해 해변가를 갔다가 욥바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701년에 46개의 성읍을 초토화시키면서 예루살렘으로 전진, 20만 150명을 포로로 잡아감. 그런데 예루살렘이 천혜의 요세인데, 기드론 시내라는 물이 있고, 힌놈의 골짜기, 아골골짜기 등이 있어서 쉽게 공격하기 어렵다. 히스리야를 못잡게 된다. 산헤립의 군사일지에 보면 내가 히스기야를 새장의 새처럼 가두었다. 히스기야는 내 진정한 적수였다. 앗수르의 군대에 패스트가 퍼졌다는 일반학설, 성경에는 18만 군대가 하루 아침에 몰살되게 됨
701년의 역사적 사건이 시온신학을 강화시켰다. 그래서 미가나 예레미야의 경고를 무시하게 됨
성전신학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기에 당연히 하나님의 집을 하나님이 지키신다는 것
공통점 다윗왕조와 하나님을 동일시하고, 예루살렘과 하나님을 동일시하고, 성전을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왕조, 예루살렘, 성전은 절대 무너지지 않는 것이라 믿게 됨. 이것을 누가 꺠뜨리셨는가? 하나님이 깨뜨리셨다. 바벨론을 통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초토화시키고, 성전도 무너지고, 다윗 왕조도 무너지게 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무너뜨림,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과 동일시 하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
한국기독교가 몰락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몰락하는 것이 아니다. 이 ᄄᆞᆼ의 교회가 무너지면 하나님이 무너지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강도의 굴혈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지상에 있는 어떤 것을 하나님과 동일시 하려고 합니다. 특정 담임목사를 하나님과 동일시하려고 합니다. 교회를 하나님과 동일시하고, 기독교를 종교로서 하나님과 동일시 하려고 한다. 이런 것을 바로 우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에는 이런 신학을 통해 예루살렘이 완전히 신격화되어지고 있다. 예루살렘을 성지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편이 말하고 성경이 말하는 성지, 또는 성산이라는 것은 거룩이라는 단어가 땅이나 산을 수식하는 말이 아닙니다. 홀리 마운틴이 아닙니다. ‘마운틴 오브 마이 홀리니스’라는 말입니다. 왜 거기가 성산인가? 왜 거기가 성지인가? 거룩한 백성이 거기 있기 때문에 성산이고 성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이 드러나기 때문에 거룩한 것이지, 산이나 땅이 거룩을 담보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 땅이나 산에 누가 살고 있는가? 그들이 어떤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느냐가 거룩한 땅이냐 타락한 땅이냐를 판단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출발점이 언약궤를 원래의 자리인 실로가 아니라, 다윗성으로 가져온 것이 신학의 출발점입니다.